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 인용사지 출토 목간 (문단 편집) == 내용 == 옛 신라시대 절터인 인용사지에서 발견된 목간 2점으로, 용왕(龍王)명 목간은 2008년, 인재천거 목간은 2010년 5월에 각각 발견되었다. || [[파일:경주 인용사지 출토 목간3.png|width=300]] || [[파일:경주 인용사지 출토 목간4.png|width=300]] || || [[https://blog.daum.net/cjddka49/15708741|사진 출처]] || [[https://psangsun.tistory.com/18|사진 출처]] || 2008년에 인용사지 [[우물]] 안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[[용왕]] 관련 내용이 있어 당시 신라인들이 우물에서 용왕신에 대한 제례를 올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. 이 목간 발견 당시 원반형 토제품 및 인화문 토기, 동곳(銅串), [[복숭아]]씨 및 각종 동물 뼈 등 제사 관련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었는데, 이 역시 용왕에게 바치는 제례품이었다고 추정한다. 이후 본 인용사지 우물 바로 옆 다른 우물에서도 동일하게 용왕신 제례를 바쳤던 흔적이 발견되었다. [[https://www.donga.com/news/Opinion/article/all/20210927/109443520/1|#]] 이에 대하여 [[일본]] 학계의 야마가타대학(山形大学) 미카미 요시타카(三上喜孝) 교수는 고대 한일 양국의 '용왕(龍王)' 새김 목간을 분석해 이들이 기우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, 해당 인용사지 목간이 칼 모양으로 가공됐으며 글자를 앞뒤로 거꾸로 쓴 것으로 보아 일종의 [[주술]]용 목간이라고 추정하였다. 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aver?mode=LSD&mid=sec&sid1=103&oid=003&aid=0004131057|#]] [[한국]]의 (재)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도 본 인용사지 우물을 포함해 신라 [[서라벌|왕경 지역]]에서 발견되는 고대 신라 우물 200여 곳 주변에서 물을 주관하는 수신(水神)으로 여긴 용왕신에게 기우(祈雨)나 기청(祈請), 치병(治病) 등을 기원하였음을 증명하는 자료로 파악하였다. 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aver?mode=LSD&mid=sec&sid1=102&oid=079&aid=0002467309|#]] 2010년 5월에 발견된 목간은 8세기에 대룡(大龍)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을 왕에게 [[천거]]한 사실을 기록한 일종의 사초이다. 목간의 형태는 세장방형(細長方形 긴 네모꼴)으로 길이 15.8 cm, 너비 1.38 cm, 두께 0.77 cm이고 수종은 [[소나무]]이다. 본 목간 앞뒤 양면에는 묵서(墨書) 약 40여 자가 확인되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.[[https://www.yna.co.kr/view/AKR20100526092000005|#]], [[https://www.khan.co.kr/culture/scholarship-heritage/article/201208221000491|#]] >大龍王中白主民渙次心阿多乎去亦在… >대룡이 왕께 사뢰기를 "왕과 백성들이 흩어지던 차에 마음에 많이 걸리는 바가 있습니다.… > >名者所貴公歲卅金(候)公歲卅五 >천거할 사람은 소귀공(所貴公)으로 그 나이가 서른이고, 김후공(金候公)은 서른 다섯입니다. > >是二人者歲▩中人亦在如契与▩右如... >이 두 사람은 나이에 (적당함이) 있습니다. 약속은 앞과 같습니다." 여기 나오는 대룡(大龍)은 [[삼국유사]]에 기록된 8세기 말 [[원성왕]]의 딸 대룡부인으로 추정된다.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고대 서체 전공 손환일 박사, [[이두]] 전공 이승재 [[서울대]] 교수 등은 본 목간에 기록된 묵서의 형식과 내용을 감안하면 이것이 해당 사실을 기록한 자료로서 정식 역사서로 정리하기 전 단계의 기록, 즉 사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하였다. 즉 이 목간은 대룡부인이 왕에게 두 인물을 천거하는 내용을 왕 곁에 있던 사관(史官)이 제3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기록물이다. 해당 목간으로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. 첫 번째는 신라시대 당시에는 비록 왕족의 신분이기는 하나 [[여성]]이 왕에게까지 관리를 공식적으로 천거할 권리가 있었다는 것이다. 두 번째는 천거된 인물 중 김후공은 김씨 성을 가진 귀족이 확실하나 소귀공은 성을 가지지 못한 신분 낮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천거받아 고위 관리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. 세 번째는 앞서 말한대로 한국은 [[조선]]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 때부터 역사서 저술을 위한 철저한 기록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. 경주 인용사지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목간들로, 당시 신라의 시대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